분류

2016년 9월 23일 금요일

4.고용 시장에 절망했다.(하)

지방의 소규모 전문대학에 배울게 없었던 이유로 학업을 중도 하차 하게된 저는 2004년 취업시장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문대 재학중이라는 신분으로 이곳 저곳에 서류를 제출해 보았지만, 무려 50여곳의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에 서류를 제출했고, 그중 서류심사에 통과해 연락이 오는 곳은 약 3곳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대기업, 중소기업, 소기업 할것없이 이력서를 제출해본 결과는 정말 참담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서류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확율이 무려 90%나 되었으니까요. 이유는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아무런 스팩도, 학업성취도 하지 못한 학생. 스스로를 믿는 자만심이 가득한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고용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많은 위험도를 제공하지 않았나 합니다. 또 한번 '어른들의 말이 맞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눈높이를 낮추고 '어디든 받아만 주기만 하면 탁월한 실력을 핵심인재가 되어주마' 라던 생각은 조금씩 수그러들었고 '받아만 주십쇼 사장님' 정도로 자존감이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등지면서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과, 동일 학군의 동료들과 비교하며 갖게 되었던 우월감은 어디에도 없게 되었습니다.

일단 낮아진 눈높이에 따라 면접을 했던 소규모 업체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영세업체, 좁다란 사무실 게으른 사람들... 처음 접한 회사의 풍경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열의는 없고, 그저 시키는 일이나 하며,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면 한없이 늘어져있는 상사들의 모습은 제가 바랬던 직장의 모습과는 너무 괴리감이 컸기에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게 되었지요.

하지만 얼마 가지않아 그 무력감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입사한지 불과 3개월차부터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지요. 들어오는 일감이라곤 사무실 인원의 급여를 충당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고, 10여명밖에 되지 않는 회사에서 아무일도 하지 않고 놀고 계신분이 둘이나 있다는 것이 엄청난 손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사무실 분위기도 좋을 리 없고, 할일 없는 관리자는 걸핏하면 회의다 뭐다 하면서 하루 2, 3시간씩은 꼬박꼬박 잡아먹는 것을 보다보니 '저놈은 할거없으면 회의 하자고 하는 구나'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급여가 들어오지 않다보니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사람을 붙들어 놓으려는 노력이 사기꾼과 다를바 없었습니다.

보나마나 얼마 안가 부도가 날 것 같다는 생각에 4개월만에 퇴사하고, 다른 업체로 옮기길 세번정도 하다보니 일년이 지났습니다. 당시에는 4대보험이 300인 이하 사업장은 의무가입이 아니었던 터라 경력 증빙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의 연속이었지요. 그렇게 1년간 홈페이지 제작, 프로그렘 제작 업체를 전전하다보니 영세업체의 생존율이 상당히 낮다는 것을 깨닫고 1년후 직종을 변경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비파괴 검사라는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광주에 있는 학원에서 한달간 합숙교육을 받았습니다. 방사선 촬영 산업기사 자격증 필기에 합격 한 후 해당 직종의 한 중견기업에 취직해서 대전인근에서 일을 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곳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방사선은 방사능 보다 노출 위험도가 낮은 편이지만, 그래도 문재는 있습니다. 방사능 물질을 가지고 투사 촬영을 하는 것이 방사선 촬영 인지라 일단 방사능 물질을 안전용기 속에 휴대해야 해서 무거운 장비를 항상 들고다녀야 합니다. (약20kg최소) 이건 뭐 운동도 되고 근육도 많이 생기니 좋습니다. 하지만 방사선의 경우 자주 쏘이게 되면 몇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렇다보니 방사선 농도에 따라 안전거리를 적절히 확보해야 하는 안전수칙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전수칙 대로 작업을 할경우 건물을 짓는 속도가 늦어져, 그만큼의 비용 손실이 발생하므로, 작업은 대부분 안전수칙은 무시된 채로 진행되게 됩니다. 방사선에 자주 노출되게 되면 발생하는 현상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체의 변화입니다. 혈소판이나 백혈구가 감소한다던가, 혹은 정자수가 감소한다. 이런 것은 외관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는 멀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썩어들어가는 상태가 되어가는 것 이지요.

지키지 못한 안전수칙은 약 6개월 후 몸에 나타났습니다. 얇은 종이에 머리카락 두께로 베인 상처가 아물지 않고 2주를 넘어서고 있던 것이지요. 혈소판 부족으로 지혈이 되지 않고 지속 적으로 피가 났습니다.

 규정대로의 유급휴가 2주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개인사정을 이유로 바로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한국은 아직도 안전 분야에서 참 불합리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안전 장구류들이 비싸다는 이유로 개인들에게 1:1 지급이 되지 않는다거나, 혹은 상사가 귀찮다고 '야 뭐 그런것 까지 체크해' 라고 말하는 한마디에 안전수칙이 무시되는 일이 허다하니까요. 현장에 써있는 '안전제일' 이라는 문구는 표어일 뿐입니다.

손을 베었던 종이 한장이 고마운 면도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가지 않아. 비파괴 검사 업종에서 백혈병에 걸리거나, 사망하는 사례들이 뉴스에 자주 나온걸 보면서 '내가 아직도 거기서 일했다면...'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비파괴 업종에서 퇴직한 이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무언가를 이룩하려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라는 뜬금 없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새로운 계획.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회사란 무엇인가 에 대한 생각 등 여러가지를 말이죠.

결론은 다시 소프트웨어 업계로 진출을 하고 싶었습니다. 업무시간에 딴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재미있고,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니 역시나 목적성을 가지고 자신의 것을 하나씩 만들어가면서 키울 수 있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창작이라던가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분야가 좋겠다. 등등의 여러 생각들이 종합되어서 나온 결론입니다.

하지만 경력도, 학벌도 없는 상태에서 소프트웨어 업계에 돌아가 봤자. 또다시 오늘내일 하는 신생회사 들을 전전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에 '유사업종 경력을 쌓아 기사 자격을 취득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지방 전문대에서 약속했던 졸업까지의 학점을 제공하지 않고, 마지막 학기에 교양과목 2개에서 출석 미달을 이유로 F학점을 준 덕에 전문대를 졸업하지 못한 재적 상태가 지속되고 있어, 최종학력을 고졸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도 한몫 했습니다.

4대보험이 지급되는 서버와 네트워크 설비를 하는 업체에 들어가 약 4년간의 경력을 쌓고 소프트웨어 업계로 진출해서 지금은 프리랜서로 있습니다. 뭐 난척좀 하자고 한다면. 같이 일했던 분들이 일자리를 소개해주시는 터라, 어려움도 없고. 개인적으로 구상한 솔루션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들을 늘려나갈 만큼 여유도 있습니다. 야근을 할 일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프리랜서로 독립하기까지 약 7년간의 직장생활은 절망적인 직장 문화와의 끈임 없는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이후 한국의 직장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차차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사회에 절망했다!
1.고교 교육에 절망했다.
2.대학 교육에 절망했다.
3.고용 시장에 절망했다.(상)
4.고용 시장에 절망했다.(하)
5.술독에 빠진 사회에 절망했다.
6.학연, 지연, 혈연으로 뭉친 사회에 절망했다.
7.무능함의 연결고리가된 직장에 절망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